얼큰진지남(SK텔레콤 블로그 에디터)

1992년, 정부는 CDMA 기술을 이동통신 단일 표준화 기술로 발표합니다. 당시 우리나라 이동통신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는 엄청난 선언이었습니다. 이동통신 역사 3편(해당 글 보기)과 4편(해당 글 보기)에서 소개해 드렸듯이 당시 한국은 아날로그 이동통신 시스템에 대한 기술 기반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지요.


  왜 CDMA냐?

정부에서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 상용화되어 있어 위험 부담이 적은 TDMA방식을 제쳐두고 CDMA 방식을 차세대 이동통신 방식으로 결정한 것은 CDMA가 가입자 수용 능력이 클 뿐만 아니라 개발에 성공할 경우 자체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CDMA 방식은 기존의 아날로그 통신에 비해 수용 가능한 용량이 크고 통화품질도 우수할 뿐 아니라 단말기 소비 전력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장점이 있다고 해도 CDMA기술을 선택한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습니다. CDMA가 당시 유럽에서 사용되던 TDMA 기술에 비해서도 시스템의 구조가 복잡하고 기지국 engineering 및 최적화 작업이 복잡하기 때문이죠. 한 마디로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지만 구현하기는 더 어려운 기술을 상용화하기로 한 것입니다.

실제로 선진국 어디에서도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원천기술을 도입하기까지는 초인적인 모험과 개발의 고통이 뒤따랐습니다. CDMA 기술 개발을 담당하는 팀의 경우 휴일 근무는 기본이었을 정도였지요. 어디 그 뿐인가요? ‘무모한 도전’이라며 한국이라는 이동통신 변방국가에서 CDMA개발에 힘을 쓰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과 냉소도 견뎌야 했습니다. SK텔레콤(당시 한국이동통신)은 1994년 11월 18일에 세계 최초로 CDMA방식 시스템 운용 시험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는 시작일 뿐. 상용화를 위해서는 교환기, 단말기 개발, 기지국 최적화, 시스템의 완벽한 구축 등 많은 과제가 남아있었습니다. 서울의 기지국 200여 개를 최적화하는 작업은 미국 통신회사인 GTE와 함께 1996년 1월 상용화를 목표로 촌각을 다투는, 그야말로 전쟁 같은 작업이었습니다. 이 작업은 서비스를 중단한 상태에서 이뤄져야 했기 때문에 매일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 진행되었으니 당시 상용화를 위해 힘쓴 SK텔레콤(당시 한국이동통신) 구성원들은 집에서 보낸 시간보다 현장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윤동윤 체신부 장관과 조병일 사장이 1994년 11월 18일 한국이동통신 중앙연구소에서 DMA 방식 시험통화를 하고 있다.


노준우, 당시 부장
"미국 통신회사인 GTE와 언어 소통 문제로 오해를 빚기도 했다. GTE의 원칙주의와 한국 이동통신의 실용주의가 맞붙어 거의 매일 전쟁과도 같은 코디네이션을 하느라 맥이 빠질 정도였다. 사실 그런 기지국 최적화 작업을 제대로 완료할 수 있을지 걱정도 많이 했다."

상용서비스를 앞두고 인천-부천간 CDMA 방식의 이동전화 서비스를 시험통화하고 있는 모습

서정욱 사장이 CDMA 기술 도입과 관련해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는 모습



  그리고 드디어 세계 최초 CDMA 상용화  

이렇듯 많은 이들의 피나는 노력 끝에 1995년 11월 중순을 넘기면서 CDMA기술은 어느 정도 완성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수많은 테스트를 거쳤음에도 ‘혹시 몰라’라는 걱정이 앞섰던 것이 사실. 마침내 1995년 12월 31일, SK그룹의 주요 임원들이 시험차량에 탑승한 가운데 인천 톨게이트 부근에서 최종 시험통화를 했습니다. 인천 톨게이트 부근에서 주안역까지 오는 과정에서 통화는 단 한 번도 끊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SK텔레콤(당시 한국 이동통신)은 2006년 1월 3일에 첫 CDMA서비스를 개시하였습니다. /SKT

험난했던 CDMA기술 개발 과정!!그만큼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있었다고 하는데요…SKTstory에서 SK텔레콤 창사 25주년을 기념하여 CDMA기술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릴 예정입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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